낙서장

문경 봉암사

여든해(이충원) 2019. 5. 13. 20:39


문경 봉암사

부처님 오신 날만 일반인에 개방되기 시작한지 얼마안된 사찰~

그렇게 보기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아무튼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로서, 879년(헌강왕 5)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지선(智詵:智證國師)이 창건한 이래 현재까지 선도량(禪道場)으로 일관해 온 선찰(禪刹)이다.

창건 당시 지선은 희양산 중턱의 봉암용곡(鳳巖龍谷)에 선궁(禪宮)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전통적 선사상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지만, 선가(禪家)의 토착화를 위한 한 방편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881년 나라에서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기화(己和)가 1431년(세종 13)에 절을 중수한 뒤 오랫동안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宜)』를 저술하였다. 그 뒤 1674년(현종 15) 화재로 소실된 뒤 신화(信和)가 중건하였고, 1703년(숙종 29) 불전과 승료가 불탔으나 바로 중건하였다. 1915년에는 세욱(世煜)이 다시 퇴락한 당우를 중건하였으며, 1927년 지증국사의 비각(碑閣)과 익랑(翼廊)을 세웠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신라 경순왕이 한때 피신한 것으로 전해지는 극락전이 있는데, 건물의 가구방법(架構方法)이 이채롭고 천장 꼭대기에 석탑 상륜부의 모양으로 보주(寶珠)를 얹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사문(寺門)과 나란히 있는 요사채 이외에는 모두가 신축된 건물로서 절 중앙 상부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오른쪽에는 규모가 큰 선원(禪院)이 있으며, 넓은 경내 도처에는 수채의 건물이 서 있으나 다른 절과는 달리 편액을 걸고 있지 않다.

이 절의 오른쪽에는 보물 제137호인 지선의 사리부도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과 보물 제138호인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가 있다. 그리고 절 앞 뜰에는 지선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는 보물 제169호의 봉암사3층석탑이 있는데, 기단구조에서 특이함을 보이며, 상륜부가 완존함으로써 주목되는 탑이다.

그 뒤 이 절은 935년(태조 18)에 정진대사(靜眞大師)가 중창하였는데 보물 제171호로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이 지정되어 있으며 보물 제172호로 봉암사정진대사탑비가 지정되어 있다. 정진국사탑비는 규모가 지증대사탑비와 같으며, 일주문을 100m 앞둔 곳에서 오른쪽으로 계곡을 건너가면 밭 가운데 있다.

희양산 산정에는 40m 정도의 벼랑을 이룬 암봉에 다섯 줄이 파여져 있는데 이것은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의 흥기를 막기 위하여 칼로 혈도(穴道)를 끊은 것이라는 전설이 얽혀 있다. 또한 봉암사의 용바위에서는 가뭄이 계속될 때 기우제(祈雨祭)가 행하여졌는데, 특이한 것은 삶은 돼지머리로 지내지를 않고 산 돼지를 몰고 올라가서 바위 위에서 찔러 피를 흘리게 하여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용이 피 묻는 것이 싫어서 비를 내린다는 속신에서 유래한다.

이 밖에도 희양산에는 대궐터라고 불리우는 석성(石城)과 군창지(軍倉址)가 있고, 산록에는 홍문정(紅門亭)·배행정(拜行亭)·태평교(太平橋) 등 임금과 관련된 명칭을 가지는 곳이 많아 신라 후기의 난세 때에 경순왕의 행궁(行宮)이 있었던 곳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봉암사 주변 계곡에는 기생이 세상을 비관하여 몸을 던졌다는 용연(龍淵)을 비롯하여 최치원(崔致遠)이 낚시를 즐겼다는 취적대(取適臺), 야유암(夜遊巖), 백송담(柏松潭), 백운대(白雲臺) 등의 소(沼)들이 있다.

또한 사찰에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계곡에 위치한 옥석대(玉石臺)는 암석에 조각된 불상 아래 넓게 깔린 암반에서 목탁소리가 난다는 명승지이다. 이 옥석대에는 바위의 북벽을 다듬고 7∼10㎝ 정도의 깊이로 감형(龕形)처럼 판 곳이 있는데, 그 안에 높이 약 6m의 좌상(坐像)이 양각되어 있다.

산내 부속암자로는 절 북쪽 중턱에 백련암(白蓮庵)이 있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1871년(고종 8)에 유겸(裕謙)이 중수하였다.



도적들이 들끓던 산 자락에 터를 잡고 봉암사를 세웠다고 전해지는 희양산의 모습



산문에 이르기까지 대략 20여분의 산책은 초하의 싱그러움과 말라보이는 물소리에 지루할 짬이 없다.



다리에 스님 세 분께서 마중을하기에 합장하고 건넜더니 일주문은 건너편에 있다.

대문도 안 지나고 법당에 들어가는 격이 되고 말았다.



일년에 한번 개방한다니 연등에 색을 붙일 엄두를 못내서일까? 다른 사찰에선 영가등으로 쓰는 하얀등밖에 없다.



오늘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일반 사부대중을 맞음에 있어 소홀함이 없을지 꼼꼼히 챙기시는 스님

주지스님이지 싶다.



한창 준비중이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그렇게 번잡스럽진 않다.



꼭 들러봐야 할 마애석불



바위가 들 떠 목탁소리가 난다.

하도 두들겨 우묵하게 패였다.



점심공양 시간은 11시부턴데 일찌감치 줄이 늘어서 있다. 이줄은 대략 300m 정도 두줄로 섰다.

10시 30분부터는 배식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한쪽에선 법회를 하고, 한쪽에선 아랑곳없이 공양을 하는 어수선함 속에 일주문을 나선다. 엄청 복잡하기전에 내려가려고~~


9산선문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중국에 전한 뒤 혜능(惠能)·신수(神秀) 등에 의하여 널리 보급되었다.

중국의 선종을 처음 신라에 전한 사람은 법랑(法朗)이었다. 그는 당(唐)나라에 유학했다가 선덕왕·진덕왕 무렵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선종 4조인 도신(道信)의 법을 이은 그가 신라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전쟁기의 신라에서 그의 사상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호거산에 은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제자로서 당에 유학하여 북종선(北宗禪)을 계승한 신행(神行)과 그 제자인 삼륜선사(三輪禪師)에 의해 선법이 중앙에 알려졌다.

특히 삼륜은 헌덕왕비 귀승(貴勝) 부인의 도움으로 810년대에 단속사(斷俗寺)를 증축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그 제자들의 활동이 뚜렷하지 않다가, 신행·준범(遵範)·혜은(慧隱)을 거쳐 도헌(道憲)에 이르러 문경에 봉암사(鳳巖寺)를 지어 선풍을 크게 떨쳤는데, 이를 희양산파(曦陽山派)라고 칭한다. 그러나 그의 손제자(孫弟子)인 긍양(兢讓)에 이르러 법계를 바꾸었다. 즉 남종선 위주의 당시 불교계 분위기로 인해 남종선을 받아온 쌍계사 혜소(慧昭)를 도헌의 스승이라 일컫게 되었다.

최근에는 긍양이 법계를 바꾼 이유를 정치적 측면에서 찾아, 후백제 견훤의 후원을 받던 긍양이 견훤의 몰락 후 신라 왕실과 친분을 유지하던 계파임을 밝혀 고려 왕실의 신용을 얻을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희양산파와는 달리 그밖의 8개 선문은 남종선을 수용했다. 그 시작은 도의(道義)와 홍척(洪陟)이 821년과 826년 각각 중국에서 귀국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도의는 신라 불교계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해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했고, 후일 염거(廉居)를 거쳐 체징(體澄)에 이르러 가지산에 보림사(寶林寺)를 세워 선풍을 떨쳐 가지산파(迦智山派)를 이루었다.

한편 홍척은 지리산에 실상사를 세워 흥덕왕과 선강(宣康) 태자의 귀의를 받았으며, 신라 최초의 산문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창한 후 제자 수철(秀澈)이 계승했다. 혜철(惠徹)도 839년 귀국하여 태안사(太安寺 : 전남 곡성)를 중심으로 동리산문(桐裏山門)을 개창했는데, 도선(道詵)-경보(慶甫)-여(如)-윤다(允多)에게 계승되었다.

한편 무염(無染)은 845년 귀국하여 성주사(聖住寺 : 충남 보령)를 중심으로 제자를 양성했다. 그들을 성주산파라 칭하는데, 대통(大通)·여엄(麗嚴) 등에게 계승되었다. 현욱(玄昱)은 839년 귀국하여 혜목산(경기 여주) 고달사(高達寺)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그중 심희(審希)가 봉림사(鳳林寺 : 경남 창원)를 세우고 선법을 전했으므로 봉림산파라 칭하며, 찬유(璨幽) 등에게 이어졌다.

도윤(道允)과 범일(梵日)은 847년 귀국하여 선법을 전했다. 도윤의 제자인 절중(折中)은 사자산 흥녕사(興寧寺 : 강원 영월)에 머물며 제자를 양성했으므로 사자산파(師子山派)라 칭한다. 그리고 범일은 굴산사에 머물렀는데, 제자 개청(開淸) 때에 이르러 사굴산파를 형성했다.

가장 늦게 성립한 산문은 수미산문(須彌山門)으로, 911년 귀국한 이엄(利嚴)이 고려 태조의 귀의를 받아 932년 수미산 광조사(廣照寺 : 황해 해주)에 머물며 법을 전했다. 그밖에도 범패를 전한 쌍계사 혜소와 중국 위앙종의 선풍을 전한 순지(順之) 등도 있었지만, 뚜렷한 산문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선사들이 중국에 유학하여 선종을 수용했던 것은 신라 하대(下代)의 교학불교(敎學佛敎)가 훈고학적 성격을 띠게 되고, 신앙이 의례화한 데 대해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귀국하여 교종의 기성 사상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각 개인이 사색하여 진리를 깨달을 것을 권유했다. 선사들의 신분은 주로 진골이었다가 낙향한 귀족, 지방에서 새로 대두한 호족, 가난한 생선장수 출신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호족 및 6두품 등 소지식인계층과 왕실의 후원 아래 선문9산이 전국 각지에 성립함으로써 지방문화가 활성화되었으며, 소율희(蘇律熙 : 또는 金律熙) 등이 활동하던 김해지방은 선종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선문9산의 개창지들은 북종선을 전했던 희양산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선풍인 홍주종(洪州宗)을 전해왔다. 이는 홍주종이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을 바탕으로 했으므로, 선사들이 유학하기 전 신라에서 화엄종의 성기사상(性起思想)과 가깝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곧 일상생활 모두가 그대로 진리·불법(佛法)이라는 입각점에 서 있기 때문에 쉽게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신라말 고려초의 선종을 9산이라고 칭하는 데 대한 비판도 있다. 첫째, 승정(僧政)이 일원화되어 있던 신라에서는 종파가 발전하지 못했으므로, 선종의 경우에도 선문9산이라는 용어는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둘째, 고달원(高達院)·도봉원(道峰院) 등도 신라말부터 고려초까지 세력이 유지되고 법계(法系)가 계승되었지만 9산문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고달원과 도봉원은 고려 중기에 천태종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9산문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9산문의 용어는 천태종이 성립한 12세기 이후에 성립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므로, 나말여초의 9산문은 오히려 선종과 조계종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희양산문

이 산문의 개산조(開山祖)는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 824~882)이다. 그의 법맥은 중국 선종 4조 도신→법랑(法朗)→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으로, 도신 문하에서 갈라져 나온 계통이다. 도헌에서 양부(楊孚, ?~917)→긍양(兢讓, 878~956)으로 이어지는데, 긍양은 899년에 당에 가서 석두 희천(石頭希遷) 문하의 선법을 전해 받고 924년에 귀국하여 희양산 봉암사(鳳巖寺)에서 희양산문(曦陽山門)을 형성했다. 현재 문경 봉암사에 있는, 최치원(崔致遠, 857~?)이 지은 〈지증대사적조탑비문(智證大師寂照塔碑文)〉은 선의 전래와 9산선문 형성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므로 발췌하여 옮긴다.

최치원, 지증대사적조탑비문(智證大師寂照塔碑文)〉
도의가 당에 가서 서당 지장의 선법을 이어받고 돌아와 처음으로 그 법을 전하여, 원숭이처럼 조급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던 교종의 단점을 감싸주려 했으나 그들은 메추라기가 제 날개를 자랑하며 붕새가 남쪽으로 떠나는 높은 뜻을 비난하듯 했다. 경전의 독송에만 젖어 있던 그들은 선법을 마귀의 말이라 했다. 이에 도의는 아직 선법의 때가 아니라 여기고 설악산 북쪽에 은둔했다. 그러나 그 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자들이 산에 가득했고, 매가 비둘기로 변하듯 교화를 받은 자들이 깊은 골짜기에서 나오니, 도(道)는 인력으로 폐할 수 없을 때가 돼야 이루어지는 법이다.

흥덕왕(826~836)이 즉위하여 그릇됨을 제거하니 나라가 평안하고 융성했다. 이즈음 홍척대사가 당에 가서 서당 지장의 선법을 이어받고 돌아와 지리산에 머무니, 왕은 법문을 청했고 궁궐에서는 그가 온 것을 경하했다. 선법을 보여서 아침의 범부가 저녁에 성인이 되게 했으니, 그의 선법은 닦되 닦을 것이 없는 것을 닦고, 증득하되 증득할 것이 없는 것을 증득하는 것이었다. 고요할 때는 산과 같았고, 움직일 때는 깊은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았다.

당으로 가서 죽은 승려도 많았고, 신라로 돌아온 이로는 앞에서 서술한 도의와 홍척이 있고, 시대를 조금 내려와서는 태안사의 혜철국사와 혜목산의 현욱(玄昱, 787~868), 쌍계사의 혜조(慧照), 신흥사의 중언(仲彦), 진구사의 각휴(覺休), 쌍봉사의 혜운(慧雲)과 굴산사의 범일(梵日, 810~889), 그리고 성주사의 무염화상(無染和尙, 800~888)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선사로서 덕이 두터워 중생의 아버지가 되었고, 도가 높아 왕의 스승이 되었으니, 옛말에 ‘이름을 감추려 해도 이름이 따라오고, 명성을 피하려 해도 명성이 따른 분들’이었다. 그리하여 그 가르침은 중생 세계를 덮었고 자취는 비석에 새겨졌다.

별도로 지게문을 나가지 않고 들창을 내다보지 않고도(당에 가지 않고도) 대도(大道)를 보았고, 산에 오르지 않고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도 보배를 얻었으며, 저 언덕에 가지 않아도 이른 분이 계셨으니, 바로 지증대사이다. 대사는 범체(梵體)에게 출가했고, 경의(瓊儀)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혜은의 선법을 이어받아 양부에게 전했다. 법계(法系)로는 당의 4조 도신이 5세(世) 부모가 되니, 해동으로 내려온 것을 보면, 도신의 제자는 법랑이요, 손(孫)은 신행이며, 증손(曾孫)은 준범, 현손(玄孫)은 혜은, 말손(末孫)이 지증대사이다.